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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

서문리뷰

by 다구네 2023. 11. 1.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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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애 유성룡 선생의 징비록을 읽고 통분스러운 마음에 스스로 경계로 삼기 위해 몇 장면을 여기에 옮긴다.
미리 대비하지 못하고, 절호의 기회는 놓치고, 유리한 지형을 스스로 포기한 아둔함에 그저 탄식이 나온다.


 
전쟁이 없을 거라고는 했지만, 우리나라는 일본이 어떻게 움직일지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왜구나 오랑캐를 지키는 일에 경험이 많을 장수들을 뽑아 여러 지방에 내려보내 무기를 갖추고 성 쌓는 일을 하도록 했다. 특히 영천, 청도, 삼가, 대구, 성주, 부산, 동래, 진주, 안주, 상주 등 경상도 지방은 성을 쌓는 일이 급해, 여러 마을에서 성을 새로 쌓거나 더 늘려서 쌓았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거의 200년 동안 전쟁 없이 평화롭게 지냈으므로 서울에서나 지방에서나 사람들이 다 편한 일만 찾았다. 백성들은 어떻게 하면 성 쌓는 일을 피할까 하는 생각만 했고, 너도나도 힘든 일을 시킨다고 불평만 했다.
나와 나이도 같고 성균관에서 일을 같이 하기도 했던 합천 사람 이로는 나에게 편지를 보내 이렇게 말했다.
“성을 쌓는 일은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합천은 정암진이 가로막고 있는데, 일본군이 날아서 건너오겠습니까? 성을 쌓는 것은 쓸데없는 일에 힘을 쓰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와 일본 사이에 ‘현해탄’이라는 큰 바다가 가로막고 있어도 일본군을 막을 수 없는데, 조그만 강물 하나 있다고 일본군이 건너올 수 없다고 하니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이때는 여러 사람들의 생각이 이와 같았다. (29-30쪽)
 
명나라 구원병이 오기 전에, 나는 일본군이 평양성에서 쫓겨갈 것을 예상했다. 그래서 몰래 황해도 방어사 이시언과 김경로에게 일본군이 가는 길목에서 지키고 있다가 공격하라고 말해주었다.
“길가에 군사들을 숨겨두고 있다가 일본군들이 지나갈 때 그 뒤를 짓밟아라. 일본군들은 굶주리고 지쳐서 도망갈 생각만 할 뿐 싸울 마음은 없을 것이다. 이때 다 잡아서 묶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시언은 즉시 중화로 떠났지만 김경로는 다른 일을 핑계로 듣지 않았다. 내가 군관을 시켜 김경로에게 빨리 가서 길목을 지키라고 재촉했더니 마지못해 중화로 갔다. 그러나 김경로는 일본군이 도망가기 하루 전에 황해도 순찰사 유영경의 공문을 받고 재령으로 돌아가버렸다. 유영경은 황해도 해주에 있었는데, 자신을 지키기 위해 김경로를 오라고 했던 것이고, 김경로는 일본군과 싸우는 것이 두려워서 피했던 것이다.
일본군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 소 요시토시, 겐소, 야나가와 시게노부 등은 남은 군사들을 데리고 밤을 새워 도망갔다. 힘이 다 빠지고 발은 부르터서 절룩거리면서 걸어갔으며 밭고랑을 기어가기도 했고 밥을 빌어먹기도 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한 사람도 나와서 그들을 치지 않았다. 이시언이 혼자 군사들을 데리고 그 뒤를 따라갔으나 감히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굶주리고 뒤떨어진 일본군 60여 명의 목만 베었을 뿐이다.
이때 서울에 머물고 있던 일본군 장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카인 우키타 히데이에였다. 그는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모든 군사 일은 고니시 유키나가가 맡고 있었다. 가토 기요마사는 함경도에서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만일 고니시 유키나가, 소 요시토시, 겐소 등을 사로잡았다면 서울의 일본군은 저절로 무너졌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가토는 돌아갈 길이 끊어져 일본군들이 크게 흔들리고 두려워했을 것이며, 바다로 도망간다 하더라도 스스로 빠져나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한강 남쪽에 있는 일본군은 저절로 무너져서 명나라군이 북을 울리며 천천히 따라가기만 해도 바로 부산까지 이르렀을 것이고, 잠깐 동안에 우리나라에 있는 모든 일본군을 다 처형시켰을 것이다. 어찌 몇 년 동안 어렵게 싸울 필요가 있었겠는가? 김경로 한 사람의 잘못이 온 세상과 관계가 되었으니 실로 마음 아픈 일이다.
나는 임금께 글을 올려 김경로의 목을 베자고 청했다. 그때 나는 평안도 체찰사가 되어 있어서 김경로는 나의 담당이 아니었다. 그래서 임금께 처형을 하자고 청한 것이다. 조정에서는 사람을 보내 처형하려고 했다. 먼저 이여송에게 알렸더니 이여송이 죽이는 것을 반대했다.
“그의 죄는 죽어 마땅하나 일본군이 아직 다 무너지지 않았으므로 한 사람의 장수라도 죽이기는 아깝습니다. 우선 백의종군하여 공을 세워서 자신의 죄를 씻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128~129쪽)
 
<녹후 잡기>
저 옛날 중국 한나라 때 어사대부 조조가 전쟁에 관한 일을 아뢰다가 이런 말을 했다.
“군대를 거느리고 전쟁터에 나아가 싸울 때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 긴요한 사항이 있습니다. 첫째는 지리 형세를 잘 이용하는 것이요, 둘째는 병사들이 복종하여 지휘관의 명령에 따르도록 미리 훈련되어야 하는 일이며, 셋째는 병기와 장비가 정예롭고 날카롭게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야말로 용병의 기본 요소이며 전쟁터에서 적과 싸울 때 승부가 이로써 결정되는 것이니, 장수된 자가 반드시 알지 않으면 안 됩니다.”
왜놈들은 전쟁하는 데 이골이 났고 병기와 장비 또한 날카롭고 정예로웠다. 옛날에는 조총이란 화약무기가 없었으나 지금은 보유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 총탄의 기나긴 사정거리와 높은 명중률은 화살보다 몇 곱절이나 될 만큼 우수했다. 피아 병기의 수준 차이가 이러했으니, 만약 우리 군대가 탁 트인 벌판에서 적과 마주쳐 상방이 대치한 상태로 조조가 말한 방법에 따라 접전을 벌인다면, 우리 군대는 절대로 그들을 이겨내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활의 사거리가 고작 100보쯤인데 비해 조총 탄환은 수백 보를 날아갔으니 말이다. 더구나 집중으로 일제사격을 가하면 총탄이 비바람 몰아치듯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오니, 활이나 쇠뇌 따위로 당해낼 수 없음은 당연한 이치다.
그렇기는 해도 험준한 산악이나 우거진 숲을 왜적보다 먼저 차지한 다음, 그 유리한 지형에 의존하여 적에게 형체를 드러내지 않도록 활잡이 사수들을 흩어 매복시켰다가 좌우 양측에서 기습적으로 일제사격을 가한다면, 저들에게 비록 조총이나 예리한 장창과 왜도가 있다 하더라도 쓸데없게 만들어, 결국은 우리가 대승을 거둘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증거로 예를 하나 들어보겠다.
임진년 그해, 왜적들은 경성에 들어온 이래 날마다 패를 갈라 성 밖을 쏘다니며 노략질을 일삼았으므로, 왕실의 무덤조차 제대로 보전하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이 무렵 고양 출신의 진사 이로라는 사람이 나름대로 활을 제법 쏠 줄 알고 담력도 지녔다. 어느 날 그가 동료 두 사람과 함께 제각기 활과 화살을 가지고 창릉과 경릉에 들어갔는데, 뜻하지 않게 숱한 왜적들이 나타나 산골짜기를 가득 메웠다.
이로 일행은 느닷없이 왜적의 무리와 맛딱뜨리게 되자, 어쩔 바를 모르고 당황한 끝에 등나무 덩굴이 빽빽하게 들어찬 숲속으로 뛰어들어 피신했다. 그러자 왜적들도 이들을 찾아 숲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피해 다니며 틈을 엿보던 이로 일행은 우거진 수풀 사이로 왜적들의 허점이 드러날 때마다 활을 당겨 쏘기 시작했다. 시위 소리가 울릴 때마다 왜병들은 어김없이 살을 맞고 쓰러졌다. 이때부터 자신감을 얻은 이로 일행은 울창한 숲속을 이리저리 재빠르게 옮겨 다니며 활을 쏘았다. 왜적들은 화살이 어디서 날아드는지 헤아릴 도리가 없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이로부터 왜병들은 숲만 보면 멀찌감치 피해 도망치고 섣불리 근접하지 않았으며, 그래서 창릉과 경릉 두 왕실의 무덤이 온전히 남아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사례로 미루어보더라도, 지형의 유리한 점을 누가 먼저 얻느냐 얻지 못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결정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왜적이 상주까지 올라왔을 때만 해도 그렇다. 신립이나 이일 같은 장수들이 만약 이런 계책을 쓸 줄 알아서 적보다 한발 앞서 토천과 문경새제 고갯마루 삼십 몇 리에 걸쳐 활잡이 사수 몇 천명을 매복시켜놓고 숲이 우거진 지형지물을 제대로 활용하여 아군 병력수의 많고 적음을 헤아리지 못하게 했던들, 승승장구 북진하던 왜적들도 속수무책으로 섬멸당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러나 신립과 이일은 훈련되지 못한 오합지졸 병사들을 데리고 요새와 다를 바 없이 험준한 지형지물을 벗어나 평탄한 들판에서 병력이나 무기 면에서 월등하게 우세한 적과 맞서 싸워 승부를 겨루었으니, 참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연한 결과라 하겠다.
내가 앞서 본문에 이 내용을 낱낱이 기록해두었으면서도 이제 모처럼 거듭하여 기록으로 남기는 까닭은 후손들에게 새삼 경각심을 일깨워주기 위해서다.
 
[출처]
 
<징비록> 김기택 옮김, 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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