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노동자 자주복지의 역사
이 글은 노동자 자주복지운동의 관점에서 에도 시대부터 현재까지 일본의 공제제도와 협동조합, 그리고 노동금고의 발현과 발전의 역사를 개략하고 있다.
1. 에도시대부터 메이지 초기 공조(협동조합)의 구조
(1) 에도 시대
① 이와미긴잔(石見銀山)의 토모코 제도(友子制度) : 공제제도의 원류
2007년 7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시마네현 오타시에 있는 이와미긴잔에서의 은 채굴은 전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성기에는 호리코라고 불리는 광부들을 포함해 20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생활했다고 한다.
광석을 채굴하고 은을 꺼내 정련하는 일련의 노동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은 상호부조 제도이기도 한 '토모코 제도'를 만들었다. 사고나 질병으로 일할 수 없게 된 노동자에게 쌀·된장·약을, 또 그 자녀에게는 양육미를 지급하는 제도다. 이러한 상호부조의 토모코 제도는 에도, 메이지 시대를 통하여 전국의 광산·탄광에서도 채용되고 있으며, 탄광 중에는 1970년대까지 계속되어 온 것이 몇 개의 연구나 기록 영화로 남아 있다. 공제제도, 협동조합의 원류라고 해도 좋다.
② 니노미야 손토쿠(二宮尊徳)의 보덕오상강(報徳五常講) : 신용금고·노동금고의 원류
1960~70년대 무렵까지 전국의 많은 초등학교 교정에는 장작을 지고 다니며 책을 읽는 니노미야 긴지로의 상이 있었으니 기억하는 분이 있을 것이다. 에도시대 말기 피폐해진 농촌을 재건하는 데 힘쓴 니노미야 손토쿠(1787~1856)의 유년기 동상이다. 니노미야 손토쿠는 농촌 부흥을 위해 지역 내로 돈을 순환시키는 보덕오상강이라는 독특한 강(신용사업)을 만들었다. 이것이 노동금고의 뿌리라고 해도 좋다.
보덕오상강은 이자를 받지 않는 신용사업으로 소개되는 경우가 많다. 그 구조는 이렇다. 예를 들어 100만엔 빌려 5년 만에 균등 상환한다고 하자. 에도시대의 일반적인 금리는 연리 20%라고 알려져 있기 때문에 매년 20만엔씩 갚아도 원금은 언제까지나 줄지 않는다. 그러나 오상강에서는 이자를 받지 않기 때문에 매년 20만엔을 갚으면 5년 만에 빚 상환이 완료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이어진다. 해마다 20만엔씩 갚으면서 생활 터전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은 100만엔을 써준 주위 분들 덕분이니 주위의 덕에 보답하는 의미에서 답례로 1년 더 내라고. 이를 보덕명가금(報徳冥加金) 또는 원서금(元恕金)이라고 한다. 결국 6년간 120만엔을 갚은 셈이어서 연리 6.2%, 현재의 노금 마이플랜 이자율에 거의 해당하는 셈이다. 이것으로 훌륭하게 사업이 성립하는, 능숙한 구조이다.
③ 오하라 유가쿠(大原幽学)의 선조주조합(先祖株組合) : 농협의 원류
오하라 유가쿠(1797~1858)는 지금은 지바현을 대표하는 위인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는데, 하세베무라(지바현 아사히시)에서 세계 최초의 농업협동조합이라고도 불리는 '선조주조합'을 결성한 것은 42세 때였다.
선조주조합은 각 농가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소유지 중 5량에 해당하는 경지를 출자하여 거기서 생기는 이익을 무기한 적립하는 제도이다. 운영에 대해서는 합의로 선정된 돌봄인이 하고, 만일 파산하는 사람이 나왔을 때는 그동안 적립한 몫의 절반을 주어 가명(家名)을 상속받게 하는 내용이었다. 또한 유가쿠는 황폐한 농지를 정리하고 농업기술을 지도하였으며, 오늘날의 생활협동조합에 해당하는 공동구입 활동과 촌민 교육 등도 실시하여 마을은 영주로부터 표창을 받을 정도로 부흥하였다고 한다.
공동구매한 물품은 농기구 비료 종자 등 농업에 필요한 것뿐만 아니라 신발, 밥그릇, 수건, 빗, 거울 등 생활용품부터 약까지 다양하다. 즉 농업 용구나 일용품의 공동 일괄 구입으로 농가의 생활 향상을 도모한 것이다. 이러한 활동들은 현재 농업협동조합의 그것과 공통되며, 따라서 선조주조합은 농협의 원류라고 한다.
그러나 농민들이 마을을 벗어나 활동한 점, 보급을 위한 대규모 교도소(教導所)를 건립한 점 등으로 막부의 혐의를 받아 실의 속에 자해하여 62세의 생애를 마감하였다.
(2) 메이지 초기부터 메이지 20년대의 협동조합(청일전쟁 이전): 법률이 없어도 있었던 상호부조 제도—아래로부터의 자주적 조직
메이지유신 이후에야 비로소 일본에서도 유럽의 협동조합을 다룬 여러 책이 번역된다. 특히 1878년 바바 다케요시(馬場武義)가 유럽의 협동조합을 소개한 「공립 상점 창립의 의(儀)」라는 기사를 「우편보지신문(郵便報知新聞)」에 실으면서 각지에서 자주적인 협동조합이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우선 법이 없어도 상호부조의 구조가 있었던 사례를 소개한다.
① 공립 상점의 탄생: 생협의 원류
바바 타케요시가 유럽의 협동조합으로 소개한 cooperative store는 공립 상점으로 번역되었다. 세이난 전쟁(西南戰爭) 이후 물가는 치솟고 서민들의 삶은 팍팍해졌다. 메이지유신은 일군만민 아래 국민은 모두 평등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쓰나가 번벌(薩長藩閥) 전제정치가 계속되었다. 이렇게 정부에 대한 불만은 자유민권운동을 일으켰고, 특히 쌀값이 폭등했던 시대 배경도 있어 생활 방어를 위해 각지에 공동구매 생협과 유사한 조직이 탄생하게 되었다.
에도 막부의 요직도 맡아 1874년 조야신문(朝野新聞)을 창간한 나루시마 류호쿠(成島柳北)는 1879년 도쿄 아사쿠사바시에서 「공제회」를 설립했다. 또 같은 해 도쿄에서 공립 상사와 동익사(同益社)가, 오사카에 오사카 공립 상점이 설립되었다. 다음 해인 1880년에는 고베 상의사 공립 상점(神戸商議社共立商店)이 탄생했다. 「영국 공립 상점의 방법을 참작」하여 설립된 오사카 공립 상점의 약속에 따르면 ① 출자금은 1인당 15엔, 200명으로 총 3,000엔의 자본으로 시작하여 점차 동지들의 증가를 도모하고 ② 쌀·장작·숯의 세 가지 품목부터 시작하여 순차적으로 일용 잡화를 취급하며 ③ 임원 임기는 1년, 총회에서 투표로 선출하며 ④ 이익의 분배는 3분의 1을 적립금으로 하고 3분의 1을 물품 구입액에 따라 배분하고 3분의 1을 출자금에 배당한다. ⑤ 5년 만에 일단 해산하도록 하는 등 협동조합 원칙에 부합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무엇보다 당시에는 협동조합이나 생협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지 않아 공립상사·상점, 공익사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들 결사는 지식인, 관리, 상업자 등 당시 상층 계급, 이른바 엘리트에 의해 만들어져 운영된 것으로 서민과는 무관한 존재였다. 그래도 운영원칙으로 볼 때 생협의 원류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그러나 1884년 이후 쌀값이 메이지 10년 수준으로 돌아오자 고물가에서 공동으로 값싼 물품을 조달해 생활 방어를 꾀하려던 이들 조직은 그 존재 이유를 잃고 자연 소멸되고 말았다.
② 보험과 공제의 맹아
유럽의 보험제도를 일본에 소개한 것은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다. 1867년(게이오 3년)에 발간된 「서양사정(부록)」의 「재난청합과 인슈어런스」항에서 insurance를 「재난청합(災難請け合い)」이라고 번역하고 화재·해상·생명의 세 종류의 청합이 있다고 하였다.
「보험」이라고 하는 말이 사용된 것은, 1869(메이지 2)년, 산토 이치로(山東一郎) 편 「신숙월지(新塾月誌)」 제2호에서, 「인슈어런스를 중국어로 번역해 보험 또는 담보라고 칭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인슈어런스에는 후하야·라이프·마린의 3종이 있으며, 「주택담보·생명담보·선박담보, 또는 화재보험, 해상보험이라고 이름 부른다」라고. 이상하게도 그 시점에서는 '생명보험'이라는 호칭만 사용되지 않는다. 목숨을 이익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꺼려졌을까.
해난사고로 인한 화물의 손해를 서로 부담하는 구조는 일본에서도 오래전부터 존재했지만, 해상보험회사가 설립된 것은 1879(메이지 12)년, 이와사키 야타로(岩崎弥太郎)가 설립한 동경해상보험회사가 최초이다. 국제적으로는 도쿄 마린(東京とリン)이라고 불렸다. 또한 화재보험은 1887년 동경화재보험회사가 처음이다.
③ 공제 500명사 탄생: 생명보험의 원류
1880(메이지 13)년 1월, 후에 야스다 은행이나 앞서 말한 동경화재 보험회사를 시작으로 많은 기업을 키웠고, 1921(다이쇼 10)년 우익에 찔려 살해당한 야스다 젠지로(安田善次郎)가 나리시마 류호쿠(成島柳北)등과 함께 「공제 500명사」를 설립하였다. 사원을 500명으로 한정해 1인당 2엔을 징수하고 직원이 사망할 경우 유족에게 1,000엔을 지급한다. 그때마다 2엔을 징수하는 구조다. 그와는 별도로 사원이 될 때 3,000엔을 징수하고, 6엔의 운용이익으로 사무비를 조달한 것이다. 그 때문에 이 제도는 「부과식」의 생명보험이라고 불린다. 말하자면 부의 제도화라고나 할까.
당시 2엔은 현재 가격으로 환산하면 2만엔 정도로 추정돼 직원이 숨질 때마다 2엔을 출연하는 것이지 서민들이 감당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니었다. 실제 사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기업인 언론계 관료 등 윗선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다음 해인 1881(메이지 14)년에는 생명표를 바탕으로 보험수리를 이용한 일본 최초의 생명보험회사, 메이지 생명보험회사가 설립되었다. 공제 500명사도 1894(메이지 27)년에 「공제 생명보험」(1947년에 야스다 생명보험)으로 보험회사가 되었다. 현재의 메이지 야스다 생명보험회사이다.
그렇다면 왜 당시 야스다 젠지로가 부과식 공제 500명사를 설립했을까, 보험수리가 어렵기 때문에 우선 부과식으로 시작한 것 같지만 그 진상은 잘 모르겠다. 어쨌든 여기서는 생명보험보다 이전에 공제가 탄생했다는 사실에서 공조를 구현하는 과정 자체인 공제야말로 보험보다 나은 왕도임을 지적해 두자.
④ 폐안된 신용조합법안: 시나가와 야지로와 히라타 도스케
일본에 의회가 개설된 것은 1890(메이지 23)년 11월이지만 이듬해 제2회 제국의회에 내무대신 시나가와 야지로(品川弥二郎)와 법제국 부장 히라타 도스케(平田東助) 등의 발의로 이미 신용조합법안이 제안되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는 폐안되어 실제로 법률이 만들어진 것은 9년 후인 1900(메이지 33)년의 일본 최초의 협동조합법인 「산업조합법」이다. 폐안된 이 신용조합법안은 독일의 그것을 본뜬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니노미야 손토쿠의 보덕오상강도 참고된 듯하다. 실제로 히라타 도스케가 니노미야 손토쿠의 제자인 하코네 유모토의 후쿠즈미 여관의 당주인 후쿠즈미 마사토오(福住正兄)를 찾아가 보덕오상강 사상에 대해 가르침을 청한 사실이 기록에 남아 있다. 1891(메이지 24)년에는 히라타 도스케 등의 손으로 「신용조합론」이 출판되었고, 이듬해에는 일본 최초의 가케가와 신용조합(현재의 가케가와 신용금고)이 설립되었다. 이것 또한 니노미야 손토쿠의 제자 오카다 료이치로에 의해 설립되었다. 이를 계기로 전국에 신협 설립 운동이 확산되면서 산업조합법 제정까지 전국에서 144개의 신협이 탄생했다. 법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광범위한 사람들을 위한 신용사업을 운영해 왔다.
2. 산업조합법 제정 이후의 협동조합: 일본 최초의 협동조합법-위에서 만든 협동조합법
(1) 산업조합법의 특징 : 위에서 만들어진 협동조합
① 신용조합·판매조합·구매조합·생산(이용)조합
「산업조합법」은 청일전쟁 후의 불황으로 인구의 80%를 차지하는 소농·소상인·직공의 피폐가 심하고 사회 불안정을 우려한 메이지 정부가 농민이나 장인의 생활 향상을 도모하는 도구로서 정부 주도로 제정되었다. 원래 협동조합은 조합원이 자발적·자주적으로 만드는 것이었고, 유럽은 물론 일본에서도 보덕오상강·선조주조합·공립상가·공제500명사·신용조합 등 서민들이 자립하여 이른바 밑에서부터 만들어 온 것이었다. 그래서 산업조합법은 관제협동조합이라고 불린다.
산업조합법은 독일 협동조합법을 참고해 4개 협동조합을 합쳐 만들어졌다. 하나는 농민으로부터의 예금 수탁과 필요한 자금의 융자를 해주는 「신용」사업. 둘째는 쌀을 비롯한 농산물을 조합원이 공동으로 유리하게 '판매'하는 사업이다. 당시 쌀 매매는 시장에 맡겨져 있었고 쌀값은 날씨 불순과 경기 동향에 좌우되어 공동으로 염매를 막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세 번째는 비료나 가정의 생활물자를 공동으로 조달하는 구매 사업. 넷째, 농산물을 공동으로 생산하고 물레방아와 농기구 등을 공동으로 설치하여 이용하는 '생산(이용)' 사업이었다.
지세 개정으로 화폐경제가 농촌까지 확대되기는 했지만, 인구의 80%가 소농·소상인·직공이었던 메이지 시대. 특히 청일전쟁 후 공황이 심해지면서 중산층 이하 국민의 궁핍으로 인한 사회불안을 억제하고 지방경제의 유지와 충실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비록 관료주도의 협동조합이라 할지라도 그 제정이 시급하였다.
② 협동조합이 왜 인가제가 되었는가
산업조합법은 독일 협동조합법을 참고해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독일의 협동조합법은 당시나 지금이나 「신고주의」이지만, 도입한 산업조합법은 애초부터 국가가 인가·감독·해산권을 갖는 「인가주의」다. 그래서 「관제협동조합」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일본의 협동조합이 왜 인가제가 됐을까.
산업조합법 제정시 제국의회 심의 중 「사회주의를 심는 것인가?」라는 질문에 정부는 「아니,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만드는 것이다」라고 답변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 빈부격차가 계속 커지는 무제약한 자유경쟁의 경제하에서 정치인과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그 경쟁사회를 억제하려는 사회주의 정책의 주장이 일었던 시기이다. 오쿠마 시게노부·도쿠토미 노하나·신와타리토 이나조 등도 동참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사회주의와는 달리 오늘날의 경쟁제도를 폐지하고 사회를 공력주의 위에 재건하려는 것의 주의로 사회 개량이지 혁명이 아니라는 것이 당시 사회주의 정책이었다. 그럼에도 사회주의 정책의 내용은 생산기계 공유, 생산관리인 공동 선출, 노동에 따른 분배 등 당시로서는 급진적인 것이었고 자립적 협동조합 원칙 그 자체였다. 이러한 시대 배경에서 메이지 정부는 자립한 농민·시민의 자주성·자치를 항상 체크하고, 언제든지 해산시킬 권한을 얻는 「인가주의」를 채용한 것이다.
산업조합법 제정과 같은 해에 노동조합을 규제하는 「치안경찰법」도 제정되어 자발적인 민중 운동을 감시하고 탄압하는 또 다른 장치도 마련되었다. 악명 높은 치안경찰법 17조에 「타인에 대해 폭행 협박 유혹 선동」하는 행위는 중금고형으로 규정하였다. 단체교섭은 경영자를 협박하는 행위, 조합 가입을 권유하는 것은 유혹 선동행위로 여겨져 죄를 뒤집어썼다. 제2차 세계대전 패배로 치안경찰법(후의 치안유지법) 등 직접적인 노동조합이나 생협에 대한 억압탄압책은 사라졌지만 협동조합 인가주의만큼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③ 영업세·소득세 면세와 원외 규제
산업조합법에서는 영업세·소득세가 면제되었다. 처음에는 일반기업과 마찬가지로 과세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법안 심의 과정에서 산업조합에 소득세를 부과한다는 것은 일반 공중에 대해서도 영업을 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조합원 범위 내에서 사업을 하겠다는 이 입법의 취지에 어긋난다는 의견이 나왔다. 그리고 「산업조합에서는 정부가 보호할 점이 매우 적으므로 ··· 소득세·영업세를 면제하는 정도의 보호를 해주어야 한다」라고 법안은 수정되엇다. 즉, 면세조치는 조합원 외의 사업 금지 = 조합원 외 규제의 대가로 취해진 조치였다. 이후 산업조합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대 세제로 변경되었는데, 「원외 규제」와 「우대 세제」는 한 세트로 오늘날의 협동조합 법제에 계승되고 있다.
④ 협동조합의 현역(県域) 규제 발생
현재의 각종 협동조합법에는 최근 들어 다소 완화되기는 했지만 「현역 규제」가 있다. 이 또한 법안 심의에서 「상호 신용이 가능하고 밀착된 곳의 편의를 도모하는 것이 목적이며, 가급적 1개 시군구 이상에 걸치지 않도록 하는 방침」 등의 논의를 거쳐 만들어진 원칙이다. 현재로 이어지는 현역 규제의 뿌리는 여기에 있다.
이렇게 산업조합법이 제정되어 전국 각지에서 농촌을 중심으로 조합이 설립되어 간다. 5년 뒤인 1905년에는 전국 조직인 「산업조합 중앙회」가 창설되어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산업조합법은 제2차 대전 후 대체로 농업협동조합법으로 계승되었다.
3. 노동조합·노동자 자주복지운동 탄생과 탄압
(1) 일본에서 고용노동자의 탄생
메이지 정부는 1879년 도쿄와 오사카에 육군 포병공창을, 요코스카 구레 사세보 마이즈루에 해군공창을 만들어 부국강병책을 추진하였다. 가마이시 광산 제철소나 청일전쟁의 배상금으로 건설된 하치만 제철소가 조업을 시작한 것도 메이지 시대 중기이다. 일본에서는 청일전쟁을 계기로 산업자본이 확립되면서 동시에 노동자 계급이 형성되게 되었다. 메이지 정부의 부국강병책이 고용노동자를 낳은 셈이다. 청일전쟁, 러일전쟁의 영향으로 고용노동자는 증대해 가는데 반면 고용노동자들 사이에는 처우를 놓고 강한 불만이 터져 나온다. 이윽고 그것은 노동조합의 결성으로 이어진다.
(2) 노조 기성회와 협동점 - 다카노 보타로와 카타야마 아야시
노동조합을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한 노동조합 기성회는 1897(메이지 30)년, 다카노 보타로(高野房太郎)와 카타야마 아야무(片山潜) 등에 의해 창설되었다.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는 메이지 헌법에서도 일단 허용되기는 했지만 단체교섭이나 파업은 단속 대상이었기 때문에 장차 반드시 이루겠다는 「기성」이라는 의미를 담은 명칭이었다. 기성회는 질병, 사망, 화재, 구조자금 등 상호부조와 공동영업회사(협동조합)를 만들겠다는 노동자의 실리를 요구한다는 방침을 세웠으며, 실제로 같은 해 결성된 철공조합은 이듬해인 1898년 상호부조를 위한 협동점을 설립한 바 있다.
협동점은 창출한 이익 중 10%를 준비 적립하고 출자배당 3할, 사업적립 2할5리, 잔액은 이용고에 따라 돌려주겠다는 유럽협동조합과 비슷한 약속을 정했다. 그래서 협동점은 노동자들이 만든 생협의 원류라고도 하며 급속히 보급되었다. 그러나 사무 담당에 적임자가 없었던 점, 대금 미지급자가 발생한 점, 또 앞서 언급한 치안경찰법에 의한 탄압도 더해져 단기간에 소멸되고 말았다.
4. 다이쇼 데모크라시 하의 노동운동과 노동자 자주복지운동
(1) 우애회의 탄생
1912년 스즈키 후미하루(文木文治) 등은 우애회를 창설한다. 영국에 프렌들리 소사이어티(friendly society)라는 게 있는데 번역하면 우애회가 된다. 공제, 친목 등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임을 표방하며 점차적으로 조합 건설 쪽으로 나아간 것은 매우 현명한 방법이었다. 일본 노동자들도 오늘날 올바르게 참고 힘을 길러야 할 때다」라고, 장래의 노동조합 건설을 위해 지금은 참고 협동조합으로서 힘을 기르자고 말하였다. 이것도 치안경찰법으로 노동운동이 사실상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며, 간판에 조합원 상호부조(협동조합) 활동을 내건 것은 노동조합 기성회와 마찬가지였다.
(2) 노동운동의 발흥과 다이쇼 데모크라시
그러나 1차대전 1914~1918(다이쇼 37) 때의 호황과 이후의 대불황이 서민의 삶을 강타한다. 1918년에는 쌀값 폭등(약 10배)으로 서민들의 분노가 각지에서 폭발하여 이른바 쌀 파동이 일어났다. 또 공장 폐쇄+해고·실업이라는 노동사정 때문에 노동쟁의가 빈발하였다. 특히 파리강화조약으로 ILO가 설립되고 결사의 자유가 인정된 것과 러시아 혁명도 영향을 미쳐 속속 노동조합이 결성되었다. 노조 결성과 단결권·파업권 보장뿐 아니라 보통선거, 부인참정권, 부락해방, 대학자치권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날로 커져갔다. 다이쇼 데모크라시라고 불리는 시대이다.
그리고 1919년 우애회도 대일본노동총동맹우애회(총동맹)로 개칭하면서 본격적인 노동운동을 지도하게 되었다.
(3) 노동자 생협운동의 발흥
동시에 노조를 중심으로 한 노동자 생협도 속속 탄생하였다. 우애회는 쓰키시마 구매조합(1919년)과 노다 구매이용조합(1924년) 등 각지에서 30개의 노동자 생협을 만들었다. 우애회를 떠난 히라사와 계시치(平澤計七)나 오카모토 도시요시(岡本利吉) 등에 의해 협동사라는 노동자 생협도 1920년 설립되었고, 그 영향 아래 다수의 노동자 생협(소비조합)이 만들어졌다. 또 같은 해 오사카에서는 구매조합 공익사가 니시오 스에히로(西尾末広) 등의 손으로 만들어졌고, 고베에서는 이듬해에 구매이용조합 고베 소비조합(현재의 코프고베)이 가가와 토요히코 등에 의해 만들어졌다. 명칭은 다양하지만 모두 노동자·노동조합 생협이다. 이처럼 노동운동과 생협운동의 뿌리는 하나였다.
이에 관청이나 대기업에서는 기업 내 복지로 온정적인 「부속구매부」를 만들어 노동자 생협에 맞섰다. 그러다 보니 노동자 생협은 관청이나 대기업에는 뿌리를 내리지 못하였다.
또한 생활 절약적인 이른바 시민 생협이 각지에서, 나아가 대학에서도 도시샤, 게이오, 도쿄 농대, 히토쓰바시 등에서 학생 구매 조합이 잇따라 설립되었다.
덧붙여 지금은 당연하게 사용되고 있는 생활 협동조합(생협)이라는 명칭은 전후에 쓰이게 된 것으로, 전쟁 전에는 구매 조합, 소비 조합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5. 노동운동 노동자 생협 탄압 그리고 해산-다이쇼 말기부터 쇼와 초기 패전까지
(1) 노동쟁의를 지원한 노동자 생협
이 시기 제1차 대전 후 공황에 따른 노동 불안으로 노동쟁의가 빈번하게 일어났다. 3만명의 노동자가 참가한 전쟁 전 최대의 노동쟁의는 1921(다이쇼 10)년 6월 고베에서 발생했다. 카와사키·미쓰비시 조선소의 대쟁의다. 우애회 간부 가가와도 앞장서서 싸웠지만 8월에 패배했고, 고베 소비조합 조합원이었던 노동조합 간부가 해고되고 상당수가 고베를 떠났다. 그 결과 생협 조합원 중 노동자 비중이 급감하면서 1만엔 이상 결손금을 내고 말았다. 가가와 도요히코가 그 결손금을 인수한 고베 소비조합은 이후 노동조합원 이외의 시민이 다수인 협동조합, 이른바 시민생협이 되었다.
노조에 대한 탄압이 격렬했으며 노조를 기반으로 하는 노동자 생협도 경영자나 정부로부터 억압받아 왔다. 그것은 노동자 생협이 노동쟁의 때 노동조합의 병참을 맡아 장기 쟁의를 뒷받침했기 때문이었다. 1921년 3월의 일본 주강소 쟁의에서는 막 설립한 협동사가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치바현 노다시의 노다 구매이용조합은 1926년 9월부터 8개월에 이르는 총동맹 관동 양조 노동조합(노다 쇼유=현 키코만)의 대쟁의를 지지하였다. 경영자와 우익들의 각종 방해에도 불구하고 쌀·된장·간장·설탕·차·숯·우동·약 등 생필품을 계속 배급하였으나 쟁의 패배의 타격으로 소멸하였다.
(2) 노동조합과 노동자 생협의 해산
1937년 7월 루구차오(蘆溝橋) 사건을 계기로 일본과 중국이 전면전에 들어간 이후 노동조합과 노동자 생협에 대한 탄압이 한층 거세어졌다. 노동절이 금지된 1938년 노동자 생협은 전시 체제하에서 끝내 스스로 해체 결의를 하고 해산에 내몰리고 만다. 또한 1940년 4월 해산 명령으로 도쿄 학생생협이 해산되었다. 시민생협은 탄압을 면했지만, 전후까지 존속한 생협은 고베 소비조합(현재의 코고베), 나다 구매조합, 구매조합 후쿠시마 소비조합 등 손꼽을 정도밖에 없었다.
노동조합총동맹도 1940년 7월 자진 해산하여, 이것으로 노동조합과 노동자 생협은 소멸되고 말았다. 애초 노동자들이 자체적으로 경영·운영하는 노동자 생협은 권력자들에게 방해가 되는 존재였던 것이다.
6. 전후 노동운동, 생협, 중앙노복협과 노동금고·전노제의 관계성-그 성장
(1) 헌법보다 일찍 제정된 노동조합법
일본 점령을 시작한 GHQ(연합국군 최고사령관 총사령부)는 1945년 10월 민주화 5대 정책을 발표하였다. 치안유지법 폐지, 재벌 해체, 부인 참정권 부여, 교육 민주화와 함께 노조 결성이 장려되었고, 바로 두 달 뒤인 12월 22일 노동조합법이 헌법과 노동기준법에 앞서 제정되었다. 군국주의를 일소하고 일본을 민주적인 국가로 바꾸어 나가기 위해 불가결한 시책이 언론의 자유이며 노동조합의 합법화였다.
(2) 총동맹과 산별회의 성립
패전 직후인 1945년 9월 중순 전쟁 전 일본노동총동맹에서 회장이었던 마쓰오카 고마키치를 합법좌파 전평의 리더였던 다카노 미노루가 찾았다. 사사건건 대립하던 전쟁 전의 경위를 넘어 ① 노동조건 개선과 일본경제 재건의 주도자로서의 임무 ② 산업별 노동조합을 주축으로 민주적 중앙집권에 준거한 동맹체 ③ 조합원의 정당가입 자유 등 3원칙에 근거한 「통일노동동맹」을 만들자는 제안이었다. 이리하여 이미 10월에는 총동맹 결성 준비가 시작되었다. 한편 공산당 지도에 의한 산별회의 결성 움직임도 시작되어 전체적으로 두 흐름의 조직이 탄생하게 된다. 1946(쇼와 21)년 8월에 총동맹과 산별 회의가 잇따라 결성되었다.
이렇게 GHQ의 뒷받침으로 노동조합은 우후죽순 결성되었다. 12월에는 38만 명, 1946년 6월 372만 명, 1947년 569만 명, 1949년에는 조직률이 무려 55.8%인 666만 명으로 급증하였다.
(3) 일찍 활동을 시작한 생활협동조합
전쟁 전 해산해야 했던 생협 진영도 패전 직후인 1945년 11월에는 일본협동조합동맹(일협)을 결성해 「노동자, 농어민 자율금융기관 설립과 고도의 협동적 사회보험 확립」을 결의한 바 있다. 협동조합에 의한 신용사업 및 보험사업을 지향한 것이었다. GHQ와도 상의한 끝에 1947년 봄까지 일협은 생활협동조합 법안을 만들었다. 내용은 「조합원의 자유로운 의지와 협동정신에 따라 협동조합을 설립할 수 있다」(인가가 아닌 준칙주의)며 금융사업, 보험공제사업도 포함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해 가을 그동안 애써주던 GHQ민정국 담당관(뉴딜파 직원)이 해임되면서 뒷배를 잃기도 하였고, 결국 이듬해 7월 제정된 법에서는 준칙주의에서 전쟁 전의 인가주의로 바뀌었고 명칭도 소비생활 협동조합법과 전쟁 전 소비조합의 잔재인 소비가 머리에 더해지고 신용사업과 생활협동조합중앙금고법 조항이 삭제되었다. 신용사업이 인정되지 않은 점도 있어 추후 생협 진영이 노동금고 설립에 협력해 나가게 된다.
(4) 생활물자 공동조달을 위해 만들어진 중앙노복협
이와 같이 노동조합이나 생협이 잇따라 결성되고 있었지만, 일본 사회는 패전 직후의 흉년도 있어 식량 사정이 절박한 데다 물가가 급등하는 초인플레이션 하(쌀값이 약 100배(1944/1949))에 놓였다. 모든 생활물자의 결핍 전에 특히 노동자의 생활의 궁핍이 극에 달하였다. 그래서 노동조합과 생활협동조합이 공동으로 각지에서 기업의 은닉물자 적발과 적정한 배급, 생필품의 민주적 관리, 작업복 확보, 목탄 불하 등을 요구하는 절실한 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생활물자 확보를 목표로 한 운동을 전국적으로 결집해 공동행동의 기관을 만들려는 기운이 높아져 당시 이미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분열·분립 되어 있던 노동조합(총동맹, 산별회의, 일노회의)과 생협(일본협동조합동맹 이후의 일본생협련) 등 36개 단체가 그 틀을 넘어 연대하여 노동자의 삶의 안정을 목표로 공동행동을 실시하는 운동 모체를 결성하였다. 그것이 1949년 8월 30일 설립된 중앙노복협의 전신인 중앙물대협(노무자용 물자대책중앙연락협의회)이었다.
(5) 노동자를 위한 은행을
고전 만담에는 가난한 쪽방 아주머니가 단벌 기모노를 들고 전당포에 다니며 당장 급한 돈을 마련하는 장면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하지만 이것은 에도나 메이지 시대의 먼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 노동금고가 탄생하기 전까지는 노동자의 일상 모습이었다. 당시 은행들은 노동자에 대한 대출을 일체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1949년경부터 노동단체들은 「상호부조 정신에 입각」한 자체 공제사업과 노동은행을 창설하고자 움직이기 시작한다. 노동은행 설립을 결의한 1951년 3월 총평 제2차 대회 의안에는 「풍부한 투쟁자금을 가지고 있으면서 금융기능을 갖지 못하고, ··· 이른바 노동자 개인의 생활자금 대출에 대해서는 은행에 예금을 갖고 있으면서도 일체 대출의 길을 끊어버려 고리 전당포나 사채로 갈수록 생활의 곤궁에 내몰고 있다」라고 당시 노동자들의 현주소가 기술되어 있다. 이들을 추진하기 위해 중앙노복협을 중심으로 하는 「생활물자 내실화와 노동금고 설립」이라는 협의의 장이 만들어져 1953년 노동금고법 제정의 큰 원동력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노동조합·생협과 노복협이 모체가 되어 전당포와 고리대금업자로부터의 해방을 목표로 한 「노동자의 노동자에 의한 노동자를 위한 은행」으로 노동금고가 전국에 탄생해 가게 된다(그 후의 노동금고 전개에 대해서는 제3장 제2절 참조).
(6) 노동자의 손으로 공제를
노동금고에 이어 노동조합·노복협은 공제사업에 착수하였다. 1954(쇼와 29)년에 오사카에서, 이듬해 5월 니가타에서 화재공제사업을 개시한 것이 전노제의 발생이다. 그 직후인 1955년 10월 1일 새벽에 일어난 니가타 대화재를 계기로 공제사업이 전국으로 전개되어 갔다(니가타 대화재의 대응을 포함하여 전노제의 활동에 대해서는 제2장 제3절 참조). 화재공제는 위험을 분산할수록 안정되기 때문에 그 직후 중앙노복협에 공제간담회가 생겨나 노제설립지원자회의로 발전, 이어 노제협의회·노제련, 그리고 오늘의 전노제로 이어진다.
(7) 상호지원·서로돕기(연대·협동) 실현
이처럼 전후 노동조합은 이념적 대립을 넘어 생협과도 협력하면서 중앙노복협을 설립하고, 이들을 모체로 노동금고와 전노제를 탄생시켜 노동자 간의 상호지원·서로돕기를 실현해 왔다. 모체는 노동조합과 노복협으로 노동운동이 스스로 만들어 냈다는 의미에서 노동금고나 전노제가 노동자 자주복지사업(운동)으로 불리고 있다. 노조에 노동금고나 전노제는 단순한 「사업자」가 아니라 「함께 운동하는 주체」라는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