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애 개념의 변화_1
서구에서 우애의 개념은 가족 간 형제 관계를 넘어 중세에는 신 아래 모든 인류의 보편적 유대를 나타내는 개념이었다. 17세기 이후 두 번에 걸쳐 새로운 의미를 얻게 된다. 첫번째 계기는 자연법학자와 계몽주의자에 의한 개념의 세속화인데, 인간의 본성, 인간성의 관념과 결합되어 우애는 세속적 유대로 변화한다. 두 번째 계기는 우애 개념의 정치화인데, 우애는 신이 아닌 인간의 의지에 기초하여 형성된 사회적 집합, 특히 나시옹이나 조국이라는 정치 집합체와 함께 사용되는 개념이 되었다.
프랑스 혁명 이후 우애의 개념은 또 한번 변화를 겪게 된다. 혁명 초기에 우애는 만인의 평등과 인민주권을 실현하다는 혁명의 이념과 결합하여 보편적 인간의 유대를 가리키는 경향이 강했다. 하지만 대외 전쟁과 국내 정파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조국과 적', '동지와 적'을 구분하는 배타적이고 이분법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우애는 보편성을 상실하고 집단적 유대를 강조하는 개념으로 굴절되었다. 동지, 동지애라는 개념은 여기에서 등장한다.
‘자유·평등·우애’라는 표현은 1790년 12월 로베스피에르가 국민의회에서 처음 사용했지만, 이 표어가 정형화된 것은 왕정 폐지 후의 일이다. 이후 제2공화제 헌법 전문에서 언급된 바 있지만, 공화국의 표어로 정착한 것은 1880년대 들어서였다.
‘우애’ 개념의 기원은 유대·기독교 전통으로 소급된다. 라틴어 ‘fraternitas’에서 온 ‘fraternité’는 12세기경부터 형제간 관계뿐 아니라 신 아래에 있는 인류라는 가족구성원들의 유대를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었다. 우애는 애초 신을 매개로 하는 개념이었고, 민족 등 특정 집단을 넘어서는 보편적인 관계를 함의하고 있었다. 중세시대 기독교 신자로 동일한 직업을 지닌 사람들은 부조금을 함께 부담하는 ‘형제단’이라 불리는 상호부조 조직을 결성하였다. 우애와 상호부조의 연결이라는 이 종교적 함의는 근대 이후에도 계속 존속한다.
다른 한편으로 이 개념은 17세기 이후 두 번의 계기를 거쳐 새로운 의미를 얻게 되었다.
첫 번째 계기는 17세기의 자연법학자와 18세기의 계몽주의자들에 의한 개념의 세속화이다. ”신 아래에 있는 형제들의 유대“였던 우애가 인간의 ‘본성’, ‘이성’. ‘인간성’ 등의 관념과 결합하여 세속적 유대를 가리키게 되었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 프리메이슨을 중심으로 기독교와 구별되는 우애 개념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두 번째 계기는 18세기 후반부터 일어난 우애 개념의 정치화이다. 신으로부터 분리된 인간들의 유대를 의미하게 된 우애는 자연법에 기초한 관계라는 의미와도 분리된다. 그리고 사람들의 의지에 기초하여 형성된 사회적 집합, 특히 ‘나시옹’이나 ‘조국’이라는 정치 집합체와 함께 언급되는 단어가 된다.
* 루소는 우애 개념이 정치화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루소는 자연상태와 사회상태에서 보편적 ‘인간성’ 관념이 규범적인 구속력을 갖는다는 생각을 부정한다. ”인류라는 단어는 이를 구성하는 개인들 사이에 어떠한 실재적 집합도 전제하지 않은, 순수한 집합에 대한 관념만을 정신에 제공할 뿐이다.“ ”인간성이라는 감정이 온 땅에 퍼지게 되면 이 감정은 희미해지고 약해진다.......인간성의 감정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서는 일련의 수단을 통해 이해와 동정심의 경계를 세우고 그 안에 압축시켜야 한다.“ 그에 따르면, 사람들은 사회의 진보와 더불어 ‘이기심’이라는 개인의 정념을 증대시키기 때문에 인류애는 질식된다. 이 없애기 어려운 정념을 추상적 관념으로 억제하는 대신, 이를 완전히 실현할 사회관계의 재구축이 필요하다. 루소는 ‘이기심’과 ‘인류애’를 매개하기 위한 ‘조국애’의 환기를 주장한다. “가장 훌륭한 덕은 조국애를 통해 만들어진다. 이 밝고 활기찬 감정은 이기심의 힘을 모든 덕의 아름다움으로 묶고, 덕을 왜곡시키지 않으면서도 이것이 모든 정열 중 가장 영웅적인 것이 되도록 에너지를 제공한다.”
루소는 소크라테스와 카토의 비유를 통해 인간애와 조국애를 설명한다. 소크라테스는 “진리를 위해 죽는다”라고 했지만, 카토는 “세계의 정복자들에 맞서 국가와 자유와 법을 지키고, 봉사해야 할 조국이 사라질 때, 결국 이 땅을 떠난다”라고 했다. 소크라테스는 자기 자신의 행복을 구했지만, 카토는 모두의 행복 속에서 자신의 행복을 구했다. 루소에게 바람직한 것은 후자, 즉 보편적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 아닌 조국에 있는 모두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다. 달리 말해 이성의 힘뿐만 아니라 조국애라는 정념의 힘도 특수의지와 일반의지를 결합한다. “우리는 시민이 되고 나서야 진정한 인간이 되기 시작한다.”
다만 루소는 국가에 대한 개인의 무조건적 봉사를 요구하지 않았다. “조국은 자유 없이, 자유는 덕 없이, 덕은 시민 없이 존속할 수 없다.” 조국이란 자유로운 시민들이 지지하는 공화국을 말한다. 단지 보편적으로 갖춰진 인간성이 아닌 국민교육을 통해 함양되는 조국애를 공화국 성립에 필요한 것으로 본 것이다. 여기서는 사적 자유와 공적 권위의 대립 또는 균형이 아닌 ‘사적인 것’에 대한 ‘공적인 것’의 전면적 우위를 읽어낼 수 있다.
이처럼 기독교적·계몽주의적·루소적이라는 최소 세 개의 조류가 프랑스혁명 이전의 우애 개념에 혼재해 있었는데, 혁명으로 신분적 질서가 해체됨과 동시에 이 다의적 용법들이 얽히고설키면서 우애 개념이 쏟아져 나왔다.
혁명이 개시될 무렵부터 ‘우애’는 평등한 시민들로 구성되는 동질적인 나시옹과 함께 언급된다. 다만 이 시기에는 우애와 나시옹의 결합에 배타적인 함의가 없었다 오히려 초기에는 개방적이고 확장적이었다. 1792년 11월 19일 법령은 “국민공회는 자유를 회복하고자 하는 모든 민중에게 우애와 원조의 손을 내밀 것을 프랑스 국민의 이름으로 선언한다”라고 선포하였다. 1792년 12월 15일 법령은 “점령지의 인민들은 이제부터 형제이자 친구이다. 모두가 시민이고, 모두가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 모두가 동일하게 조국을 다스리고, 조국에 봉사하며, 조국을 지킬 임무를 가진다”라고 쓰여 있다. 노예제 폐지를 요구하거나 외국인에게 국적을 부여하는 등의 장면에서도, 우애는 만인의 평등과 인민주권이라는 프랑스혁명 이념과 결합했고, 보편주의적 ‘인간’들의 유대를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는 경향이 강했다.
우애의 의미가 변한 것은 대외전쟁이 격화되고 국내적으로 지롱드파와 산악파(자코뱅파)의 대립이 격화된 1793년경부터였다. 생쥐스트는 ‘조국’과 ‘적’(귀족, 외국인, 배신자)의 준별에 기초한 배타적 관계로 ‘우애’를 사용하였다. 이 시기 자코뱅파가 즐겨 사용하던 표어는 ‘우애인가, 죽음인가’, 즉 ‘우애를 통해 결합되는 동지인가, 아니면 죽어야 할 적인가?’라는 이분법이었다.
혁명 초기에 ‘자유’나 ‘평등’보다 드물게 사용되는 ‘우애’는 1793년 이후 공화주의자들의 담론에서 특권적 위치를 점하게 된다. 로베스피에르의 1794년 국민공회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한다.
“우애는 마음의 결합이고 원리들의 결합이다. 애국자는 애국자하고만 결합한다...... 인민들이 현명한 법 위에 자신의 자유와 안정을 건설할 때, 적들이 인민을 해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할 때, 우애의 때가 도래한다. 자유의 적이 존재하는 한, 귀족들이 자신들끼리 우애의 관계를 맺는 한, 애국자는 애국자하고만 결합한다...... 우애는 덕의 친구들을 위해서만 존재한다.”
프랑스혁명 초기에 ‘우애’는 기독교적·계몽주의적 용법을 계승하고 특정 집단을 넘어선 보편적 관계를 의미하는 개념이었지만, 프랑스혁명 중기 이후 루소의 영향이 매우 짙게 밴 조국애론으로 변했고, 이윽고 자코뱅파의 담론에서는 내부의 적을 배제하고자 하는 개념으로 귀결되었다. 테르미도르 반동 이후 우애는 테러의 기억과 결합되었고, 1830년대의 공화주의자들이 이를 복권하기까지 오랫동안 기피 대상이 되었다.
[출처]
<빈곤과 공화국 : 사회적 연대의 탄생>, 다나카 다쿠지 지음, 박해남 옮김, 문학동네